<아래 내용은 sehoon-jo 블로그에서 퍼온 글입니다. 우리 조문(趙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어 <참고자료>로 올립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는 부문도 있을 수 있지만 이를 고려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옥천조씨
우리 집안은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본관 옥천(玉川)은 전라북도 순창의 옛 이름이다. 옛날 순창에는 옥이 나오는 산이 있었다고 하고 지금도 옥정호라는 이름의 호수가 남아있다. 순창 군지에 따르면 시조 조장(璋)(또는 俊璋)은 고려조에 옥천 사람으로 음서로 득관하여 벼슬이 검교대장군 수문하시중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음서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 지방의 호족들을 관리로 등용하는 방식이었다.
조장의 아들은 홍규(洪珪)였고 판도판서를 지냈다. 그는 다시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전 (佺)이고 둘째 아들은 태사공(太史公) 여(㒜)다. 옥천조가는 이들 3세에서 크게 부원군파와 태사공파로 나뉜다.
부원군파
옥천부원군 전의 아들인 농은(農隱) 조원길(趙元吉)은 옥천조씨의 부원군파 중시조이며 문중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1345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그는 고려를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 하여 정몽주 등과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여 1등공신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성계에 의하여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본향 순창으로 들어가 다시는 벼슬 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유학자로서 충실한 삶을 산 것이다. 그는 자손에게 유훈으로 생사진퇴 무괴의자(生死進退 無愧義字)을 남겼다고 한다. 즉, 죽고살고 나아가고 물러섬에 의(義) 자를 부끄럽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유훈이 가문에 회자 되어 이후 종훈이 되었다. 그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말 五隱으로도 불렸다.
조원길은 뛰어난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특히 첫 아들 요제공 영(瑛)(1344~1428)과 둘째아들 부정공 유(瑜)(1346~1428)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조영은 학문이 뛰어나 고려조에서 이미 전공판서를 역임했으나 아버지와 같이 낙향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조선 개국의 실권자 태종 이방원이 그의 학 문을 높이 평가하여 이조판서와 세자 충령(훗날의 세종대왕)의 사부로 불렀으나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정금대에서 거문고를 뜯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살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를 백이숙제에 비유하여 칭송하였으며 그가 노닐던 산을 정금봉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가 지은 시가 전하는데 “저 흰 구름 내마음 알거나, 청산만이 고인 같네. 나라 잃은 슬픔 말하려니 구름 낀 산이 찡그리네”라는 시가 전하고 세종 10년인 1428년까지 84세를 살았다고 한다.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내월리 내적마을이 직계 후손들의 세거지이다.
한편 호가 옥천인 둘째아들 유 또한 매우 뛰어났는데 고려왕조에서 지군사로서 전남 영광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고 벼슬이 이미 전농시부정에 이르렀는데 그 또한 아버지 조원길과 함께 고향으로 물러났다. (※ 5세조 瑜의 호는 虔谷(건곡)이고 字는 兪玉(유옥)인데 필자가 호를 옥천으로 잘 못 기술한 것으로 보임)
그는 효심이 특히 뛰어나서 아버지 원길이 죽었을 때 몸소 흙을 져다 봉분을 짓고 3년의 시묘살이를 하여 삼강행실에 전할 만큼 효심이 높았다고 한다. 태종이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한성부판윤(현 서울시장)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그 또한 신하로서 두 임금은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의 절의를 내세워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지금의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로 낙향하였는데 이곳은 순창에서 남으로 호남정맥(노령산맥) 산줄기를 넘어 약 백이십리 거리로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강을 바라보는 위치이다. 참고로 보성강은 보성에서 동북의 내륙 방향으로 이 곳 죽림리 앞을 흘러 올라가 곡성군 압록에서 섬진강과 합류한다. 그가 순창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것은 박팽년의 아버지였던 순천박씨 박중림과의 교유가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그 또한 장수하여 세종조까지 살았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태종은 이들 세 부자를 부자삼현이 라고 높이 평가하여 수차례 벼슬을 주어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응하지 않아 안타까워하였고 세종대왕도 이들 삼부자를 높이 여겼다. 특히 조유가 죽었을 때 세종대왕은 효자전부정 조유지여라는 정려를 하사하였고 또 친히 그를 높이 칭송하는 18구의 어제시까지 지어 육관에게 내려 보냈다.
그 정려가 아직까지 순천 주암읍 죽림리의 상호정 안에 남아 있다. 이 세 사람은 높은 학문과 함께 끝까지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켜 세상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고 옥천조씨 가문의 첫 전설이 되었다. 세종대왕의 어제시는 다음과 같다.
御製詩 (어제시)
聖朝不屈忠臣節 (성조에서 충신의 절개 꺾지 않으니)
小子微衷在述事 (소자의 적은 충정. 일을 기술하네)
淵明號猶晋處士 (도연명은 오히려 진나라 처사로 자처하고)
子陵官非漢諫議 (엄자릉(嚴子陵)도 한나라 간의 대부사양했네)
前朝雪月暎金石 (전조의 흰 달은 금석에 비추고)
孝子丹心書庸識 (효자의 붉은 마음 빗돌에 새겼네)
先生忠節本於孝 (선생의 충절은 효도에 근본하고)
事親餘誠殉國志 (부모 섬긴 정성으로 순국의 뜻 두었네)
淸標伯夷採薇山 (맑은지조 지닌 백이는 수양산에서 고사리 캐고)
至行高柴泣血涙 (지극한 행실 지닌 고시는 피눈물 흘렸다)
先朝好爵不移操 (선조 때의 좋은 벼슬에도 지조 굽히지않고)
君子貞心松栢翠 (군자의 곧은 마음 송백처럼 푸르르네)
南州古宅考槃處 (남쪽 지방 거처하던 옛 집에)
旌孝彝章嘉乃意 (효자 정려 내린 아름다운 뜻)
淸芬尚挹百行源 (맑은 향기는 백가지 행실을 끌어당기고)
美蹟將垂三尺誌 (아름다운행적은 세자지석(誌石)에 새겼네)
新天爵祿示若浼 (새 조정의 벼슬과 녹봉 모욕으로 여겼으니)
炳日丹忠知不二 (해처럼 밝은 충성 두 마음 몰랐네)
因其舊啣表其閭 (그 옛 직함으로 정려를 내렸으니)
特志王章恩禮異 (특별히 내린 나라의 은혜 우악하네)
之仁之德豈二心 (인과 덕이 어찌 두 가지 마음이랴)
惟孝惟忠同一致 (효와 충은 다 일치한 것)
人間公以故國臣 (살아서는 고려의 신하요)
葬亦銘旌副正字 (죽어서의 명정도 부정자였네)
孤臣素節石可語 (고신의 깨끗한 절개 돌에 새기니)
也應忠魂欣不寐 (충성스런 넋 기뻐 잠 못 이루리)
高風推憶冶隱家 (높은 풍성의 야은가를 생각하니)
注書前啣兩無愧 (주서와 부정 둘 다 부끄럼 없네)
斯人斯孝表章地 (이 분의 그 효도를 표장한 마당에)
石面官啣何以記 (빗돌의 관작을 무어라 기록하랴)
生前表志沒後願 (생전에 드러낸 뜻 죽어서도 원하리니)
豈曰違之意可遂 (어찌 그 뜻을 어길 수 있으랴)
君親大義視無間 (임금과 어버이 사이 두지 않음은)
臣子彝倫賴不墜 (신하의 떳떳한 도리 떨어뜨리지 않은 것)
移忠恨未作我臣 (그 충성 옮겨 우리 신하 안 됨 한스러워)
悵望金烏興感思 (서럽게 금오산 바라보니 감회 무한하네)
註:금오산(金烏山):경상북도 선산(善山)에 있는 산. 고려 말의 학자이며 충신인 길재(吉再)가 숨어 지내는 곳
그의 묘자리도 무학대사가 잡아준 자리라고 한다. 무학대사는 조씨 가문을 위하여 두 개의 명당터를 잡아 주었는데 하나는 전북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산 86-14번지로 옥천부원군 조원길의 묘가 되었고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124호이다. 다른 하나는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 장군봉 아래 오공혈에 있는데 이곳은 조유의 묘지로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산소 입구에 제각인 정헌재가 남아있다.
셋째아들이 광양공 근은 부친과 형들은 고려에서 벼슬을 하였으니 물러남이 마땅하지만 자신은 고려조의 왕을 섬기지 않았으니 과거를 보겠다며 시험에 나가 단번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광양현감이 되었으나 벼슬을 오래 하지 않고 일찍 귀향하여 유유자적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넷째아들 절제공 염도 과거에 급제하여 만호장을 지냈다고 한다. 다섯째는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조에 벼슬을 하지 않았던 자손들은 조선 이후 다시 출사를 하게 된다. 이들 중 조유의 아들 사문(斯文)과 숭문(崇文)이 있는데 사문보다 둘째 숭문이 더 뛰어났던 모양이다. 성삼문의 고모부이기도 하였다는 숭문은 세종 때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함길도병마절도사에 이르렀는데 아들 철산(哲山)과 함께 단종복위사건에 사육신 등과 함께 주도하였다가 실패하여 세조 2년인 1456년에 부자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당시에 사육신 외에도 약 5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태종, 세종에게 큰 후의를 입은 집안이었으니 그 은혜를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수양대군의 난으로 단종이 귀향을 가자 숭문이 형 사문에게 자신은 나라를 위하여 이미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다며 단종복위 거사에 참여할 뜻을 전하였다. 이에 종팔품의 무인(?)이었던 형 사문은 자신도 동생과 뜻을 같이 하겠다고 하였으나 숭문이 자신이 잘못될 경우 집안의 제사를 모실 사람이 없으니 형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간곡히 주장하여 사문은 고향으로 돌아 왔다. 하지만 단종복위 거사가 실패하고 숭문부자가 처형된 후 형 사문 또한 고향에서 체포되어 전주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다행이 숭문의 손자 하나가 강화도로 귀양을 갔다가 훗날 복권되어 대를 잇게 된다.
세조가 말년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이들을 복권하여 동학사에 초혼각을 만들 때 이들을 배향하였다. 훗날 정조임금도 이들 부자의 충성과 절의가 성삼문 부자와 같다고 하고 이들을 단종의 장릉과 순천의 겸천서원에 배향토록 하였고 숭문을 병조판서 겸 의금부사 오위 도총관에 추증하고 부자의 이야기를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에 기록하였다. 이로써 조유는 아들 숭문, 손자 철산과 함께 순천시 주암면 겸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지금은 없어진 겸천서원(현재도 존재)은 조씨 집안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서원으로 조유, 조숭문, 조철산과 함께 김종서 박중림 박팽년을 배향하였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에 따라 없어졌다가 다시 중건하였다. 부자삼현의 불사이군의 충절에 이어 사문, 숭문부자의 죽음은 충의를 중시하는 조선에서 옥천조씨를 충절의 집안으로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집안 후손들에게는 또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이들이 복권된 이후 강화도에 귀양갔던 철산의 아들이 죽림리로 돌아오고 이곳은 그 후손들의 세거지가 된다. 현재 죽림리에 사당 겸천사와 상호정 영모재와 정려 비각들이 남아 있어 전라남도 문화재가 되었다. 이후 조유의 후손들이 주로 순천, 승주, 곡성, 주암 등에 흩어져 살게 된다.
태사공파
다시 3세로 올라가서 옥천부원군 전의 동생 태사공 여(太史公 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벼슬은 금자광록대부 태 사상주국 문하시중 평장사로 왕의 사부이며 벼슬이 당대 최고의 직급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원래 태자의 사부였다가 태자가 고려 충정왕이 되자 왕이 공부하는 서연(書筵)에서 집의(執義)로서 박충좌, 이제현 등과 함께 시독하였고 후에 벼슬이 검교문하시중 동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태사는 왕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그의 아들 지후공 원기(元琦)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조선 창업을 하면서 큰 집의 형님인 옥천부원군 원길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한 상황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원기는 다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연(淵)이고 둘째는 완(浣)이다. 옥천부원군의 아들 원길과 그 두 아들이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낙향하였지만 셋째인 광양공 근과 넷째 절제공 염이 벼슬을 하였던 것처럼 동생인 태사공 여의 후손인 연과 완은 고려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의 창업 이후 출사하였다. 연은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완도 벼슬이 서주부사까지 올라갔다. 큰 집인 부원군파에서도 광양공 근이 광양현감을, 절제공 염이 만호장이 되었고 작은집에서는 연과 완이 판서와 부사로 성장하면서 옥천조씨의 가세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집권 당시 함길도 병마절도사이었던 큰집 조카 숭문이 단종복위 운동에 가담하였고 이로 인하여 사문, 숭문 형제와 아들 철산이 처형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하여 옥천조씨 일족이 모두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다.
우리집은 옥천조씨 태사공파 중 판서공파인데 태사공 여의 손자 연의 후손이다. 그는 태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역임하여 판서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판서공 연의 아들 응(膺) 또한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의 정사품 벼슬인 사인(舍人)이 되었다. 그는 세종과 문종, 단종을 모셨는데 세조의 반정 이후 1455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이는 큰 집의 6촌 형제인 사문, 숭문 그리고 조카 철산이 단종 복위거사에 가담하여 1456년 처형이 되는 사건이 있기 직전이었다. 응은 호를 반구정(伴鷗亭)이라고 짓고 임실군 식산촌(食山村)에 내려와 조포도(潮浦島)라는 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지인들과 시를 지으며 지냈는데 사람들이 이 정자를 조사인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아들 득재도 막 출사하여 벼슬이 정칠품 사정에 이르렀으나 아버지와 같이 임실로 귀향하여 아버지 반구정 응을 모시며 살았다고 한다. 8세 장손은 고원군수, 그의 둘째 아들과는 통덕랑, 과의 둘째아들 세린은 행영광군수, 그의 장남 11세 원개는 생원시를 거쳐 현감이 되었다가 임실에 귀향하여 임진년까지 지인들과 교류하며 시를 짓고 살았다. 이들이 우리의 직계 조상이 된다.
이처럼 판서공 연의 아들 사인공 응이 임실군 오수에 낙향하여 자리 잡은 이후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임실 인근 지역에 퍼져 살았고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 냉천마을이 우리 판서공파의 후손들의 세거지가 된다. 이곳은 섬진강의 상류에 접한 마을로 본관인 순창에서는 약 35km정도로 구십리 정도이니 당시 사람들이 걸어서 하루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임실에서 흘러내려간 섬진강은 순창을 거쳐 구례에서 남원에서 흘러내려온 지류를 만나 하동으로 내려간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물을 좋아한 것 같다. 대부분 섬진강이 보이는 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순천의 사당 이름도 천과 함께 한다는 겸천사이다.
임진왜란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우리 옥천조씨 씨족은 주로 순창과 순천, 임실 등에 퍼져 살게 된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원길의 후손 조정이 아들과 조카 및 식솔이 함께 담양의 고경명 장군과 함께 싸웠다. 이때 관직에 나가 있던 20여명의 조씨들이 관직을 버리고 동참하면서 따르는 인원이 700여명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머리에 옥천인이라는 띠를 두르고 의병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당시 조씨들이 대부분 부유하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의병장으로 추대한 고경명과 함께 북진하다가 호남으로 진입하려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금산은 원래 조선시대 전라도에 속하던 땅으로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고경명의 의병들이 관군과 함께 왜군을 막기 위하여 정면 대결하였으나(1차 금산전투) 결국 패하여 의병에 나선 많은 씨족들이 죽었다.
이후 이곳에서 의병장 조헌이 이끄는 승병 등 700여명의 의병들이 다시 한 번 왜군과 정면 충돌하는데(2차 금산전투) 역시 패하여 모두 죽게 된다. 이들을 모아 합장한 묘가 칠백의총이다. 이러한 두 차례 전투와 격렬한 저항으로 금산과 무주지역의 왜군도 큰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다. 결국 임진왜란에서는 진주성싸움과 금산 전투에서의 의병들의 이런 치열한 저항 때문에 왜군들은 결국 호남지방에는 진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태사공파 연의 후손으로 우리의 직계조상인 11세 조원개도 임실에 살고 있다가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돈독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현감 벼슬을 버리고 임실로 귀향하여 지인들과 교류하며 시를 읊으며 살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실군수와 순창군수 김천일과 함께 거병하여 두치라는 곳에서 왜병과 싸우다 여러 명의 왜병을 베고 창을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순천쪽의 일족이 고경명 장군과 금산전투에 참가한 동안 순창, 임실 등에 살던 일족들은 당시 순창군수였던 김천일 장군, 임실군수 등과 같이 싸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장남 종길의 아들 대에서 장남이 임실의 세거지를 지키지 못하고 금구로 이사하게 된다. 한편 그의 둘째아들 12세 조종립은 선조 때 중부참봉, 그의 아들 13세 조시헌은 참봉, 그 아들 14세 조정호는 인조로부터 통정대부(정3품)에 제수되어 벼슬을 이어갔다. 조정호의 장남 15세 조중기가 임실에 남아 살고 차남 조중휘가 임실에서 남원으로 이사하여 우리 집안이 남원에 자리를 잡게 된 연유가 된다.
남원으로 이주한 조중휘의 장남 16세 필옥은 숙종 때 첨정의 벼슬을 하였으나 이후 그의 장남 17세 운혁, 그 차남 18 세 학순, 그 삼남 19세 상우, 그 차남 20세 복렬 그 차남이자 우리의 증조부인 21세 효부까지 벼슬이 없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태사공파는 임실의 세거지를 중심으로 살던 종가 쪽도 가문의 세가 약화되었고 차남 중휘의 계보인 우리 집안도 상당한 재력은 유지하였으나 숙종 이후에는 벼슬이 없는 남원의 향반이 되었다. 아마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관련이 있 을 것이다.
한편 부원군파에서는 조선 숙종 때 조이중이 삼도수군통 제사와 순천부사를 역임하였고 문장과 지식이 훌륭하여 조선왕조실록과 호남절의록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가 되면 서원이 주요 학파와 가문이 명맥을 있는 근거가 되었다 순천 지역의 부원군파 후손들은 순천(승주군) 죽림리의 겸천서원을 중심으로 호남의 명문가문으로서의 그 세를 유지하였다. 그 중 조규하는 조선 말 임실군수로 면암 최익현과 함께 거병하여 승주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조경한과 순천지역 제헌국회의원 조옥현 등이 배출되었다. 이후에도 조연하, 조순승, 조흥규등이 국회의원이 되었다.
우리 고조부 조복렬도 비록 벼슬은 없었지만 아직 상당한 재산은 가지고 양반 지주의 체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장남 효현도 매일 아침 관대를 갖추고 사당에 배알하였고 어머니에게 문안하여 인근에 효자로 소문이 나 훗날 일제 강점기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그에게 효자상으로 금화 9원을 포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가 조선의 영향력 있는 양반들을 회유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증조할아버지인 효부(자 선집)는 차남이어서 인근 남원시 왕정동 412번지에 분가하여 터를 잡았고 이곳에서 육형제를 낳았고 그 중 넷째가 우리 할아버지 택준이다.
정체성
요즘 세상에 족보를 이야기하고 가문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 있다. 또 유전적으로나 혈통적으로 보면 시조는 그리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유전적으로는 사람의 부모가 둘이니 양쪽을 다 계산하여 따라 올라 간다면 우리의 조상은 2의 승수가 되어 10대만 올라가도 조상이 1024명이나 되는 것이고 20대를 올라가면 104만명이나 되 는 셈이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은 실제로 이런 식으로 조상을 찾는데 이 방식으로 조상을 따지면 조상은 수없이 많고 또 중복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0대 이상 조상의 유전자 는 나에게 1000분의 1쯤 남아 있는 셈이니 유전적으로 시조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온 민족이 동포라는 말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뛰어난 인물을 시조로 모시며 가문을 만드는 것은 유전적 혈통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자손들이 자신의 선조 중 뛰어난 인물을 시조나 중시조로 모시고 그들의 활약이나 성취를 이야기하면서 가문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스토리텔링 같은 것이다. 살다보면 힘들 때가 많고 나태해지기 쉽지만 뛰어난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구전하면서 그런 뛰어난 인물을 본받기 위하여 정진하게 된다. 충절의 이야기가 구전되는 분위기에서 자란 후 손들은 정신적 가치와 의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이고 학문적 성취가 큰 인물을 조상으로 둔 후손들은 지난 한 학업의 고통을 참아내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노력들이 모여야 뛰어난 인물이 나올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것은 혈통보다는 오히려 롤모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씨족의 경우 부자삼현의 이야기가 유학자 자손으로 서의 집안의 정체성을 대표한다. 이 정체성이 이어져 단종복위 운동에서 죽은 숭문과 철산이 나오고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임실로 낙향한 사인공 조응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들의 이야기가 듣고 자란 후손들 중에서 임진왜란 중에는 조정과 조원개처럼 의병장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은 조선말에도 이어져 다시 조규하 같은 한말의병장 그리고 조경한 같은 독립운동가가 나온다. 우리 종조부 조중일도 그런 문화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말에 동학운동에 접장으로 참여하였을 것이다.
종종 본인의 형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느껴졌던 우리 아버지 동진의 자존심이 조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비록 자신은 배움이 없고 가난하여도 부자삼현의 이야기처럼 고려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집안의 자손이고, 수양대군의 위세에도 타협하지 않고 복위운동을 벌이거나 낙향한 기개 있는 집안의 후예이고 또 지주 양반의 손자였던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순천의 큰집 사람들은 유학도 가고 국회의원들도 여럿 나왔다며 부러워하였는데(그들이 조경한과 조옥현이었다) 이런 자부심 때문에 비록 매우 가난하였을 때에도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고 남에게 아쉬운 말 하는 것이 그리 어려웠고 어떻게든 자식들을 잘 키워서 훌륭한 인물을 만들겠다는 꿈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옥천조씨 세거지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내월리 내적마을이 옥천조씨 직계 후손들의 세거지이다. 전북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산 86-14번지에 있다는 원길의 묘도 무학대사가 잡아준 명당 이라니 한번 둘러볼만 할 것이다.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와 죽림리 일대는 부원군파 조유의 후손인 부정공파의 세거지로 한국의 100대 명당지 중 하나라고 한다. 아직도 조유의 종택인 조승훈 가옥이 구산2길 43에 남아있고 겸천서당, 경천사, 정려, 경운각, 상호정 등의 유적들이 남아있다. 이 근처의 순천시 주암면에서 선암사로 가는 길은 한국에서 가장 한국적인 경치를 간직한 곳으로 유홍준 교수가 꼽는 곳이다. 내가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가보고 지난해인 2019년 연말에 들러보았는데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다음에 선암사를 가게 되면 이곳 죽림리를 꼭 둘러볼 생각이다. 근처인 주암면 구산리 구산강변에 구호정이라는 한옥식당이 있는데 옥천조씨 절민공파 종가집의 며느리의 손맛을 볼 수 있다고 하니 여기도 한 번 들러보면 좋을 것 같다
태사공파의 경우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 냉천마을이 세거지이다. 그러나 태사공파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로 오면서 가문의 세가 약화되고 종가가 이어지지 못하여 태사공의 묘소만 남고 조사인정 같은 유적이나 재실 등이 유지되지 못하고 유실되었다. 이에 후손들이 새로이 구 세거지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 냉천마을에 재실을 지었다고 한다. 직계 후손의 경우 오수에 가면 한번 둘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